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푸아 운동 (문단 편집) == 잠깐의 부활 == 라푸아 운동 간부들이 감옥에 갇혀 있던 1932년 6월 5일, 그 후신으로서 "애국인민운동(IKL)[* "이코앨"이라고 읽는다.]"이 출범했다. 내세우는 이념은 대핀란드주의, 교권파시즘, 반소주의로 라푸아 운동 시절과 대동소이했다. 정식 정당이 된 이들은 '의회의 기독교 도덕화'를 주장했으며, 당간부 다수가 루터교 성직자들이었다. 제복은 검은 옷에 파란 넥타이였고, 당원들끼리는 [[로마식 경례]]를 했다. 산하에 청흑단(Sinimustat)이라는 청년단체를 두고 [[교련]]을 했다. 주된 지지자들은 부농들, 중산층, 공무원, 루터교 목사, 대학생들이었다. 즉 가난하고 못 배운 노동계급이 아니라, 배울 대로 배운 중산층들 사이에서 지지세가 가장 강했다. 이때 노동자들은 사민당과 공산당으로 갈려서 경쟁하고 있을지언정 일단 좌익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확고했다. 이건 사실 전 유럽에서 똑같았고. || [[파일:IKL_parliamentary_group.jpg|width=300px]] || || 1938년 의사당 계단 앞의 IKL 의원들. || 창당 이후 꾸준히 총선에 참여했는데, 1933년 선거 때는 스빈후부드의 [[국민연합당]](KOK)과 단일화를 했다. KOK-IKL 선거연합은 이 때 32석을 얻었는데, 그 중 14석이 IKL이고 KOK는 18석이었다. KOK는 1930년 선거에서 42석을 얻었는데, IKL과 연합하면서 무려 24석을 잃은 것이다. 선거 참패의 결과 당권이 스빈후부드에게서 [[유호 쿠스티 파시키비]]로 넘어갔다. 파시즘을 극혐하던 파시키비는 [[사회보수주의]] 정당이었던 KOK를 친대기업 [[시장자유주의]] 정당으로 체질개선을 하고, IKL과 손잡자고 했던 자들을 당무에서 모조리 내쫓았다.[* 파시키비는 [[핀란드 대공국]] 시절에는 총독부에 협조하자는 보수주의자였다. 그때는 스빈후부드가 헌법수호를 외치는 호헌파로서 파시키비보다 진보적이었다. 10여년 사이 두 사람의 위치가 뒤바뀐 셈.] 1936년 총선에서 이 때 [[국민진보당|진보당]]-[[핀란드 중앙당|농민당]]이 내전기의 오랜 앙금을 씻고 대승적으로 [[핀란드 사회민주당|사민당]]과 연정하면서 이듬해의 대통령 선거에서 스빈후부드가 연임에 실패하고 [[퀴외스티 칼리오]]가 대통령이 되었다. 이로써 IKL은 완전히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다. 1938년 말부터 법무장관 [[우르호 케코넨]]이 IKL을 제재하기 위한 법적 절차 검토를 시작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